‘호남 출신 뽑지 말라’했다는 이병철 회장 유언에 관한 소문
삼성 비자금 사건 때 ‘호남 출신에 배신 당했다’ 여론도
2019년 삼성그룹 사장단 중 호남 출신 3명

고용정책 기본법 제7조 1항은 ‘사업주는 근로자를 모집·채용할 때에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 신앙, 연령, 신체조건, 사회적 신분, 출신 지역, 학력, 출신학교, 혼인·임신 또는 병력 등을 이유로 차별을 하여서는 아니 되며, 균등한 취업 기회를 보장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조항이 실제 채용 과정에서 준수되고 있는지는 미지수입니다. 지난해에는 공공기관에서 블라인드 채용을 실시한 결과 비수도권대 출신, 지역 인재, 여성의 합격 비율이 늘어났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는데요. 부동의 국내 1위 기업 삼성의 경우에는 어떨까요? 항간에는 삼성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이 ‘호남 출신을 요직에 앉히지 말라’고 지시했으며 그룹 내에서 이것을 불문율로 지키고 있다는 이야기도 떠돌고 있습니다. 과연 이 소문은 사실일까요?

◎ “호남 출신은 뽑지 말라” 유언, 근거가 있을까?

고 이병철 회장의 사진에 ‘호남 출신 사람들은 뽑지 말며 뽑더라도 절대 요직에 앉히지 말라”는 문구를 합성한 사진이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종종 공유되고 있습니다. 이 사진을 퍼다 나르는 사람들은 ‘이병철 회장의 유언에 포함된 내용이라더라’며 이 말의 출처를 전하기도 했죠.

그러나 이 같은 소문에는 근거가 없습니다. 이병철 회장의 장남인 고 이맹희 CJ 명예 회장이 집필한 회상록 <묻어둔 이야기>에는 ‘아버지는 유서를 만든 적이 없다. 아버지의 유언은 모두 구두였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구두 유언의 내용 중 알려진 것은 그룹과 주식을 자녀들에게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 정도뿐입니다. 그러니 이병철 회장이 유언으로 호남 차별 발언을 했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죠.

이병철 회장이 그런 말을 했을 리 없다는 근거로 이건희 회장의 부인 홍라희 전 리움 미술관 관장이 전주 출신임을 꼽는 이들도 있는데요. 호남 출신을 불신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아들의 결혼 상대로 전주에서 태어난 홍라희 여사를 고르지는 않았을 거라는 추측입니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홍라희 전 관장은 전주에서 태어났을 뿐, 서울에서 자랐기 때문에 호남 출신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반박이 뒤따랐습니다.

◎ 삼성 비자금 사건과 김용철

삼성그룹의 비자금 운용을 폭로한 김용철 전 삼성그룹 법무팀장이 호남 출신이라는 사실을 들어 “이건희이 회장이 아버지의 말을 무시하고 호남 출신을 믿었다가 뒤통수를 맞았다”고 주장하는 네티즌들도 있었습니다. 1983년 25회 사법 시험에 합격한 뒤 검사로 근무하던 김용철 씨는 1997년 삼성 구조조정본부 법무팀 이사로 취임합니다. 이후 2004년까지 삼성에 몸담으며 삼성 구조조정본부 재무팀 상무와 전무, 그리고 법무팀 팀장을 역임했죠.

2004년 6월 승진 제의를 뿌리치고 나와 법무법인 서정의 파트너로 합류한 그는 2005년 비보도를 전제로 한 인터뷰에서 “국회의원 중 삼성 돈 안 받은 사람이 없다”고 발언하는 한편 익명으로 “삼성 에버랜드 사건은 구조조정본부에서 개입한 것”이라는 증언을 하기도 했죠. 또한 2007년에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을 통해 삼성 주요 인사들이 모두 차명계좌를 갖고 있으며, 이를 통해 삼성이 거액의 비자금을 운용하고 있다고 폭로합니다. 2010년에는 <삼성을 생각한다>라는 제목의 책을 펴내 삼성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도 했죠.

이렇게 김용철 씨의 폭로로 삼성이 곤란에 처하고 이건희 회장 등 주요 구성원이 기소되는 상황에 이르자, 삼성그룹의 잘잘못과는 관계없이 김용철 씨가 광주 출신임을 들어 ‘결국 호남 출신에게 배신당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겁니다. 2009년에는 호남 출신 CEO였던 배정충 삼성생명 부회장과 고홍식 삼성석유화학 사장이 퇴출되고, 각 계열사에서 발표한 부사장 승진 대상자 중에 호남 출신이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아 ‘김용철의 폭로와 비자금 사건이 삼성 그룹에 호남 출신에 대한 경종을 울린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 역대 삼성 사장단 인사에서 호남 출신의 비율은?

이병철 회장이 진짜 그런 유언을 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삼성에서 호남 출신 고위급 인사가 비교적 드물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몇몇 언론에서는 삼성 사장단의 출신 지역 비율에 대한 기사를 종종 내보내기도 했는데요. <CEO 스코어 데일리>는 2013년 8월 14일 기사에서 당해 삼성을 비롯한 5개 그룹에 호남 출신 사장이 없다는 점을 보도합니다. 삼성 사장단 48명 중 출신지 파악이 가능한 45명은 전부 비호남 출신이며, 영남지역 출신이 19명으로 가장 많다는 내용이었죠.

2016년 <데이터 뉴스>도 비슷한 기사를 내보냅니다. ‘삼성그룹 사장단 48인, 호남 출신 제로’라는 제목의 이 기사에서는 삼성그룹 사장단 48명 중 호남 출신자가 전무하다는 소식을 전했는데요. 이번에는 서울 출신이 42.6%로 가장 많고 영남 출신이 29.8%로 그 뒤를 이었죠.

◎ 2019년, 사장단 내 호남 출신 인사는 세 명

그렇다면 2019년의 상황은 어떨까요? 삼성그룹의 2019년 주요 계열사 대표 및 사장단 현황, 그리고 이들의 출신 고등학교를 바탕으로 살펴보면 총 42명의 사장단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역시 서울 출신입니다. 서울 경복고를 졸업한 이재용 부회장을 비롯해 고동진 삼성전자 IM 부문장, 김현석 삼성전자 CE 부문장도 각각 서울 경성고와 동대부고를 졸업했죠. 이 외 총 19명의 사장급 인사가 서울 출신이었습니다.

서울의 뒤를 이은 것은 영남권이었습니다. 노태문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개발 실장을 비롯해 대구·부산·경북·경남을 통틀어 12명의 영남권 인사가 삼성그룹 사장 직급에 올라 있죠. 충청권 출신은 4명, 강원은 2명, 경기권은 1 명이었습니다.

호남권 인사는 총 3명입니다. 정은승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장이 전북 전주고 출신, 황득규 삼성전자 중국 삼성 사장이 전남 순천고, 홍원표 삼성 SDS 사장이 광주 광주고 출신이죠. 다만 홍원표 사장은 출생지는 수도권이며, 광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온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지금까지 고 이병철 회장이”호남 출신은 뽑지 말라”고 유언했다는 소문과 삼성 그룹 내 호남 인사의 비율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 전 회장이 그런 발언을 했다는 소문의 진원지가 어디인지, 또 그 말이 사실인지는 알 길이 없었죠. 2019년 사장단의 실제 출신지 비율을 살펴본 결과 서울과 영남권이 호남권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기는 하지만, 강원권 출신 사장보다는 호남권 출신 사장이 1명 더 많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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