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존경하는 CEO, 유일한 박사
자신의 주식 절반 직원들에게 나눠줘
가족 경영 거부 및 독립운동 행적

우리는 흔히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 자신이 지닌 부와 권력을 이용해서 더 많은 욕심을 부리는 권력형 비리를 보고 듣는데 익숙하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존재했던 기업가 중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으로 불리는 한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그는 다름 아닌 유한양행의 창업자 故 유일한 박사다.

유일한 박사는 기업가가 사회적 책임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산증인으로 한국인이 존경하는 CEO 중 항상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는 인물이다.

1895년 평양에서 태어난 유일한 박사는 9살의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뒤 미시간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그는 서른한 살이 되던 해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국민 건강 향상과 기술 인재 양성을 목적에 두고 유한양행이라는 회사를 세웠다.

유일한 박사가 세운 유한양행은 초기에는 미국 의약품만 수입하다가 1933년부터 국산 의약품 개발 및 판매에 뛰어들었는데 이때 나온 약품이 그 유명한 ‘안티푸라민‘이다.

유 박사는 특히 식민지 시기였던 당시 조선의 전국 각지에서 직접 차를 몰고 제품 홍보 및 보급에 나서면서 의약품과 생활용품 공급에 몸을 바쳤다.

무엇보다 유일한 박사는 유한양행을 깨끗한 회사로 키우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는 1936년 대한민국 기업 최초로 전사원 주주제를 실시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유일한 박사가 전사원 주주제를 시행하면서 자신이 갖고 있던 주식의 52%를 당시 재직 중이던 직원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준 것이다.

유일한 박사는 또한 정경유착을 철저히 거부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는 법인세는 꼬박꼬박 철저하게 납부했지만 정치자금 납부에 대해서는 일절 거부했고, 국세청에서 수개월간 세무조사를 실시했지만 당시 세무조사원이 “아무리 털어도 먼지 안 나는 경우가 있구나”라며 혀를 내둘렀다고 전해진다.

그뿐만 아니라 유일한 박사는 가족경영을 포기하면서 기업의 소유와 경영을 분리했으며, 대한민국 기업 최초로 전문 경영인(CEO) 제도를 실시했다. 유 박사는 전문 경영인 제도 이외에도 대표이사는 딱 1회까지만 연임을 가능하게 해서 장기 집권을 불가능하게 했다.

유일한 박사는 그 외에도 딸과 손녀에게 묘소 주변 땅 일부와 학자금 1,000만 원 정도를 준 것을 제외하고는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그는 심지어 임종 직전에도 회사에 남아있던 일가친척을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해고했다. 추후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이 유한양행 창업주 일가의 연락처를 회사 측에 알아내려고 했을 때에도 “그분들 연락처는커녕 지금 어디서 뭐 하시는지도 모르겠다”라는 충격적인 대답을 들었다고.

이처럼 남다른 업적을 남긴 유일한 박사는 1971년에 향년 75세 나이로 영면에 들었는데, 그의 사망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 CIA의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유 박사가 생전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행적까지 추가로 밝혀졌다.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1
4
+1
3
+1
15
+1
1
+1
0

랭킹 뉴스

실시간 급상승 뉴스 베스트 클릭

5 전체 댓글

LEAVE A REPLY

Please enter your comment!
Please enter your name 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