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직할 때 공고에서 가장 눈여겨보는 내용은 무엇인가요? 맡게 될 직무가 무엇인지, 연봉이 얼마인지를 체크하고 나면 ‘야근 빈도’에 대한 언급이 있는지 찾아보는 분들이 많을 텐데요. 대놓고 ‘우리 회사는 야근이 잦다’고 써놓는 기업은 없기 때문에 다른 항목을 보고 야근 여부를 미루어 짐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직을 여러 번 경험한 직장인들은 ‘숙직실이 구비되어 있다’거나 ‘야간 교통비를 지급한다’는 것을 복지로 내세우는 회사는 대체로 야근이 잦았다고 이야기하죠.

남들은 모두 퇴근하는 시간에 사무실에 남아있는 것도 싫은데, 야근의 일정부분이 ‘공짜’라면 그 억울함은 더욱 심해질 겁니다. 비용 부담이 적으니, 회사에서는 더욱 마음 편히 야근을 시킬지도 모르는 일이죠. 이런 공짜 야근이 가능한 건 급여에 모든 수당을 포함해 일괄 지급하는 ‘포괄임금제’ 때문인데요. 최근 게임업계에서 잇따라 포괄임금제를 폐지하는 움직임이 일어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게임업계 빅 3의 새로운 선택


지난 2일, 게임 개발업체인 엔씨소프트는 오는 10월 중으로 포괄임금제를 포기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합니다. “자세한 근로조건은 직원 대표와 논의 중”이라며 “앞으로도 성숙하고 발전적인 엔씨만의 근로 문화를 만들어갈 것”이라고 밝힌 엔씨는 국내 대형 게임업체 3곳 중에서는 가장 늦게 포괄임금제 폐지 대열에 합류했죠.

엔씨에 앞서 넥슨은 올 2월, 넷마블은 3월에 포괄임금제를 폐지한 바 있습니다. 이 외에 포괄임금제 폐지를 결정한 게임사에는 웹젠, 위메이드, 네오플, 펄어비스, 스마일게이트 등이 있는데요. 이들 업체는 왜 최근 들어 잇따라 포괄임금제 폐지를 결정한 걸까요? 아니 그전에, 왜 직원들과의 근로계약에 포괄임금제를 적용하고 있었던 걸까요?

포괄임금제를 적용한 이유


실제 근로시간을 따지지 않고 연장, 야간, 휴일근로 등을 미리 정하여 예정된 수당을 지급하는 포괄임금제는 1974년 대법원 판례에 의해 인정된 이후, 근로시간이 불규칙하거나 노동자가 재량으로 근로시간을 정할 수 있어 시간외근로 수당을 명확하게 확정 짓기 어려운 경우 주로 적용되어왔습니다.

그런데 게임업계가 ‘시간외근로 수당을 명확하게 확정 짓기 어려운 경우’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의견도 많습니다. 업무 특성상 거의 모든 작업이 PC로 이루어지고 초 단위로 기록이 저장되는 시스템 구축이 가능하기 때문인데요. 초과 근무시간 파악이나 수당 계산이 어려워 포괄임금제를 적용한다는 건 ‘미리 정해둔 적은 금액으로 초과근무를 요구하려는 기업의 핑계’라는 것이 이들의 판단입니다.

구로의 등대, 판교의 불기둥


게임업계 노동자들의 야근은 워낙 악명이 높아 이를 특별히 지칭하는 용어까지 등장할 정도입니다. ‘크런치 모드’는 게임·소프트웨어 개발 업계에서 신작 발표 등을 앞두고 수면과 영양 섭취, 사회활동을 희생하며 지속하는 장시간 업무를 뜻하죠. 게임 업계 종사자 버전의 벼락치기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우실 텐데요. 시험 전 밤샘 공부야 미리 준비하지 않은 내 탓이지만, 크런치 모드는 사정이 조금 다릅니다. 개발 기간과 비용을 줄이기 위한 회사의 지시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주위가 전부 어둑해질 때까지 홀로 빛을 내뿜는 일이 잦아 특이한 별명이 붙은 게임 업체들도 있습니다. 구로구에 위치한 넷마블은 ‘구로의 등대’, 판교동에 자리 잡은 위메이드는 ‘판교의 불기둥’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왔죠.

과중한 스케줄이 불러온 결과


2017년, 위메이드는 비상식적인 초과근무 스케줄로 여론의 질타를 받습니다. 공개된 내용에 따르면 사 측은 4월부터 11월까지 7개월간 평일 오전 10시에서 9시, 공휴일과 토요일은 오전 10시에서 오후 7시, 일요일은 출근시간 관계없이 9시간 근무를 요구했습니다. 연내 게임 출시에 실패할 경우 초과 근무에 대한 수당을 반납해야 하며, 저녁식사 시간은 30분으로 제한한다는 내용도 담겨 있었죠.

넷마블에서는 급기야 직원의 돌연사 사건까지 발생합니다. 게임 개발 업무를 담당하던 이 직원은 급성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는데요. 고인은 발병 전 12주 동안 지속적인 야간·초과근무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발병 4주 전에는 주 78시간, 7주 전에는 89시간이나 근무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노조와 주 52시간 근무제


포괄임금제와 과도한 시간외근무로 인한 부작용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노조 불모지’였던 게임업계에도 하나둘 노동조합이 생겨납니다. 넥슨은 2018년 9월 3일, 스마일게이트는 이틀 뒤인 9월 5일 노조를 결성했는데요. 넥슨 노조가 포괄임금제 폐지를 강력하게 요구한 결과, 사 측은 지난 2월 포괄임금제 폐지에 합의합니다.

지난해 7월부터 시작된 300인 이상 사업장에서의 주 52시간 근무제 역시 게임업계 변화의 발판이 되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기업들이 포괄임금제를 포기할 수 있는 건, 어차피 1주일에 52시간 이상 근무를 요구할 수 없기 때문에 포괄임금제로 인한 수당 차익이 종전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2021년부터는 300인 미만 사업장에도 52시간 근무제가 적용될 예정인데요. 그때쯤에는 소규모 게임업체들도 포괄임금제 폐지 행렬에 동참하며 구로와 판교의 밤이 깜깜해질 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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