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LA에서 웹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는 이제니 씨의 근황이 전해지면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남자 셋 여자 셋>의 깜찍하기만 했던 막내 ‘제니’가 미국에서 유능함을 뽐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팬들은 ‘정말 반갑다’, ‘괜히 내가 뿌듯하다’는 반응을 보였죠. 오늘은 이제니 씨만큼이나 여러분이 반가워할 한 사람을 소개해볼까 하는데요. 고등학생 신분으로 데뷔해 다수의 히트곡을 내더니, 돌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이소은 씨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17살에 데뷔한 실력파 가수
이소은 씨가 첫 앨범을 들고 나온 것은 1998년의 일이지만, 대중 앞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로부터 2년 전인 1996년입니다. 당시 잠실 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그는 EBS 창작가요제에 참가했고, 작곡가 윤상의 눈에 띄어 본격적인 데뷔를 준비하게 된 것이죠.
데뷔 당시 17세 여고생이었던 이소은 씨는 나이는 어리지만 가창력과 고운 목소리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실력파였습니다. 특유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와 순수한 이미지가 잘 맞아떨어져, 고정적인 팬층도 확보할 수 있었죠. 특히 국악 멜로디를 배경으로 하는 2집 타이틀곡 ‘서방님’은 ‘서방님~내 서방님~’하는 애절한 가사로 전 국민에게 사랑을 받습니다.
엄친딸, 미국으로 가다
이소은 씨가 잘한 건 노래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남들은 머리 싸매고 공부만 한다는 고등학교 시절에 가수 활동을 병행하고도 고려대학교 영문과에 합격했죠. 2007년 대학 졸업 후에는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에서 유학한 뒤 시카고 노스웨스턴 대학교 로스쿨에 진학했는데요. 한국에서의 성공을 뒤로하고 새로운 도전에 뛰어든 것은 “가수를 어릴 때 시작했으니, 삶을 길게 봤을 때 다른 걸 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라네요.
아버지의 학업과 일 때문에 초등학교 시절을 미국에서 보낸 그였지만, 성인이 되어 돌아온 미국에서의 공부가 그다지 녹록지는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때 이미 토플 만점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영어 실력도, 어려운 법률용어가 난무하는 로스쿨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죠. 입학 6주 뒤 치른 첫 시험에서 꼴찌를 차지한 그는 ‘내가 이렇게 능력 없는 사람인가’하는 생각에 눈물 콧물을 펑펑 쏟으며 울었다고 하네요.
뉴요커 변호사의 일상
하지만 이소은 씨는 거기서 주저앉지 않습니다. 피나는 노력 끝에 2012년 우수한 성적으로 노스웨스턴 대학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 시험에도 합격하죠. 뉴욕의 한 로펌에서 변호사로 일하던 그는 현재 국제상업회의소 국제중재 법원 ICC(International Chamber of Commerce)의 뉴욕지부 부의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뉴욕에서 일하는 변호사에 국제중재 법원 부의장이라니, 어쩌면 가수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시절보다 화려한 삶을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2017년 SBS <영재 발굴단>으로 오랜만에 한국 팬들에게 근황을 알린 이소은 씨는 여느 직장인처럼 패딩을 입은 채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두 엄친딸을 길러낸 비결
사실 이소은 씨네 집에는 엄친딸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이소은 씨의 언니 이소연 씨죠. 줄리아드 스쿨 음악학교에서 학사를, 동 대학원에서 석사를 받고 윌리엄 페첵 상까지 수상한 피아니스트인 그는, 신시내티 음대에서 동양인 최초의 교수로 재직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언니는 피아니스트에 교수, 동생은 국제 변호사에 ICC 뉴욕지부 부의장이라니, 이쯤 되면 대체 부모님이 이들을 어떻게 교육한 것인지 궁금해지는데요. 이소은 씨 부모님의 교육철학은 다름 아닌 ‘방목’이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에게 공부하라 다그치지 않고, 뭐든 스스로 부딪치며 깨닫도록 내버려 두었더니 스스로 삶의 가치를 형성했다는 것이죠.
이소은 씨가 로스쿨에서 가장 낮은 성적을 받고 펑펑 운 다음날, 아버지는 메일을 통해 ‘아빠는 너의 전부를 사랑하지 네가 잘할 때만 사랑하는 게 아니다’라고 말씀해주셨다고 합니다. 이소은 씨가 지금의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의 이 따듯한 응원에 다시 공부할 힘을 얻은 덕분이었다는데요. 자녀의 성장에 부모님의 믿음과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