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지휘자 하면 어떤 생각들이 떠오르시나요? 아마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답변은 ‘진부하다’, ‘지루하다’가 아닐까 싶은데요. 유난히 변화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더디다고 알려진 클래식 업계에서 남들이 가지 않는 게임 음악 공연이라는 길을 걸으며 ‘1세대’를 자처하는 지휘자가 있습니다. 현직 지휘자, 주식회사 플래직의 대표 두 가지 직함으로 클래식 업계에 작은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진솔 대표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진 대표의 대학 시절(좌) 그녀의 열정을 자극한 지휘자 세이지 오자와(우) / liveen

청소년기 시절 정신적, 육체적 학대를 당한 진솔 대표는 대학 진학을 포기했습니다. 이유에 대해 묻자 “왜 가야 하는지 납득이 안됐어요. 스스로 ‘뭘 해야 하지?’ 이런 생각에 갇혀서 내적으로 갈등 중이었거든요.”라고 답했는데요. 그러다 세이지 오자와라는 지휘자를 우연히 접한 뒤 지휘라는 길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음악을 하던 보수적인 부모님은 ‘여성 지휘자’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몰래 입시를 준비했죠. 정식으로 입시 레슨을 받은 적이 없었지만 피나는 노력 끝에 진솔 대표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당당히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공부와 실기를 모두 잡아야 하는 지휘 전공은 이론이나 소양도 중요하기 때문에 음대생들 사이에서 소위 ‘범생이 학과’로 불립니다.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온 동기들과 달리 아침에 눈 뜨는 것조차 힘들었던 진솔 대표는 대학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는데요. 어느 날 교제하던 친구가 장학금을 받는 모습에 ‘장학금’을 목표로 또다시 그녀의 스위치가 켜졌습니다. 출석은 물론 성적까지 상위권을 유지하며 범생이로 변신했다는 그녀는 “제가 마음을 먹기까지가 오래 걸리지, 마음을 먹고 나면 실행이 빠르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됐어요. 그 이후로 제 이미지는 물론, 주변의 공기 흐름까지 바뀌더라고요.”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진솔 대표는 독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인식이 변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보수적인 클래식 음악계의 종사자들은 아무래도 해외 유학을 중요하게 여기는 편입니다. 필수라고 하시는 분들도 간혹 계시죠.”라고 했는데요. 그녀가 말하는 ‘클래식 종사자’들의 취업과 구직이 궁금해졌습니다. “만약 일반적으로 회사에 들어가 월급을 받는 게 취업이라면, 클래식 업계에는 취업이라는 단어 자체가 좀 낯설다고 볼 수 있어요.”라며 놀라운 답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소득보다는 예술을 택하는 이들이 최종적으로 클래식 길을 걷게 된다고 하는데요. 진솔 대표는 “실제로 고학력자도 많고 노동의 강도도 높지만 돈이 되는 시장이 아니라 뭘 해도 명예직밖에 되지 않아요.”라며 일반적이지 않은 클래식 업계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실제로 지휘 학과 졸업생들은 한 가지 단체에 소속되지 않고 직함이 여러 개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말 능력이 있더라도 단기 계약직이 허다하죠. 구직이 쉽지 않다 보니 개인 레슨을 하는 이들을 쉽게 볼 수 있는데요. 사업 신고 없이도 할 수 있기 때문에 불법이라는 인식이 종종 있지만 대부분의 수익은 개인 레슨으로 창출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진솔 대표는 ‘젊은’ 지휘자’에 대한 선입견이 가득했던 클래식 업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아르티제, 말러리안 등과 같은 클래식 프로젝트를 이어나갔습니다. 그러던 그녀는 오래전 국내 게임 회사들이 국내 클래식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에게 협력 요청을 거절당해 해외 쪽으로 눈을 돌렸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요. 기존 연주자들이 게임 음악을 거부한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클래식 음악은 클래식으로만 남길 바랐던 업계의 분위기 때문이었죠.

‘내가 좋아하는 걸로 첫 발을 내딛어보자’라는 생각으로 게임 음악 공연 기획사, 플래직을 창업하게 되었습니다. 업계 최초로 게임 음악만을 전문적으로 연주, 공연하기 시작했죠.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분야인 만큼 걱정이 많았는데요. 진 대표는 결과에 대해 다행히도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현재 2명의 직원과 함께 플래직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 역시 직원은 아닙니다. “그만큼 공연이 많지도 않고 시장 자체가 작기 때문에 사실상 단원 분들을 모두 직원으로 채용해서 월급을 주는 게 불가능해요.”라고 설명했죠.

진솔 대표가 회사를 차린 후 가장 힘들었던 건 게임 업계와 클래식 음악 업계의 입장과 관점 차이였습니다. 게임 업계에서 게임 음악 공연은 제품 홍보 수단, 팬들을 위한 이벤트, 고위 관계자들의 니즈를 충족시켜줄 수단 정도로 여겨져 왔고 수익 창출이 첫 번째 목적이기에 예술은 조금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대로 클래식 음악 업계에선 게임 음악을 실용음악으로 치부하고 돈이 되지 않더라도 정통 클래식을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입장이 강했죠. 결과적으로 서로의 입장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플래직은 ‘한 번의 공연이라도 제대로’라는 생각으로 페라리의 장인 정신을 택했습니다. 그녀는 “사업 영역을 넓힐 계획은 없어요. 게임 음악에 한해서 진행할 예정이죠.”라며 플래직이 추구하는 방향을 설명했는데요. 진 대표가 가장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은 다름 아닌 저작권입니다.

국내에서 행해지는 적지 않은 수의 게임 음악 공연 중 저작권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며 “시장 자체가 돈이 되지 않기 때문에 ip 문제를 신경 쓰지 않는 공연들이 많아요.”라고 했는데요.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시간과 비용, 노력이 필요하더라도 저작권을 존중하는 문화 확립이 중요하다는 것이 진 대표의 생각입니다. 덕분에 블리자드와 ‘클린 캠페인’을 홍보하기도 했죠.

많이 바뀌었지만, 그럼에도 클래식 업계의 변화 속도는 여전히 느립니다. 대구 MBC 교향악단, 아르티제 말러리안, 한국 예술 영재교육원의 지휘를 맡고 있는 그녀 앞에 붙는 수식어는 ‘젊은 여성’, ‘햇병아리’등이 대부분이었죠. 이에 대해 “IT라든지, 다른 분야를 보면 ‘젊은’ 사장을 대단하게 여기고 인정해 주잖아요. 하지만 음악 시장에선 여전히 젊은 지휘자의 자립은 쉽지 않아요”라며 현 상황을 우려했습니다. 물론 개방적인 사고를 갖고 있다 자부하는 그녀 역시 검은 정장이 아닌 파격적인 의상을 택한 해외의 지휘자를 보고 놀라기도 합니다. 그녀는 이런 경험들을 통해 클래식 업계의 변화 속도가 단지 조금 느릴 뿐이라며 이해하고 있죠.

진솔 대표는 지휘자를 꿈꾸는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로 소통을 꼽았습니다. 다른 클래식 악기 전공과는 달리 어느 정도 몸이 성장한 후에 지휘를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인 데다 평생에 걸쳐 자신만의 지휘법을 연마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몸의 움직임과 테크닉은 자연스럽게 성숙해집니다. 그러므로 손과 팔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등의 기술적인 요소보다는 단원들과의 진정성 있는 소통에 대한 고민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들을 이끌어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직업인 만큼 단원들에게 ‘왜 못 따라오지?’라는 생각을 갖기보단 스스로를 컨트롤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일방적인 소통을 이어간다면 결국 단원들과의 불화는 물론 그 자신도 정신적으로 힘들어져 지휘자의 꿈을 접어야 할 수도 있죠. 실제로 젊은 지휘자들이 지휘자의 길을 포기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앞으로의 목표에 대해 묻자 그녀는 “장기적인 목표는 없어요. 딱 떠오르는 답이 없더라고요. 요즘 들어 다양한 플랫폼과 콘텐츠가 등장하며 문화계 자체가 워낙 빠르게 변화하고 있어 단기적인 목표들을 계획하고 있습니다.”라며 솔직한 답변을 내놓았는데요.

지휘자로서 훌륭한 연주를 할 수 있도록 내실을 다지고 플래직과 함께 저작권을 지켜나가며 좋은 퀄리티의 공연을 최대한 많이 해내는 것이 그녀의 목표입니다. 공연들을 영상, 음성 등 기록으로 남겨 먼 미래에 돌아볼 수 있는 작은 역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죠. 클래식, 게임 음악 공연을 아우르는 진솔 대표가 어떤 역사를 써내려나갈지, 더욱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