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퍼니 페이스’보며 디자이너의 꿈 키워
62년 ‘살롱 앙드레’ 열며 정식 패션계 데뷔
김희선, 이병헌 등 당대의 톱스타들에게 사랑받은 디자이너
마이클 잭슨의 전속 요청에 “나는 한국 디자이너”

스스로 패션 아이콘이 되는 디자이너들이 있습니다. 올 2월 사망한 샤넬의 칼 라거펠트는 빗어넘겨 묶은 백발과 까만 선글라스, 몸에 꼭 맞는 슈트와 높은 깃의 셔츠로 유명했죠. 자신만의 독특한 룩으로 잘 알려진 한국 디자이너로는 고 앙드레 김 선생을 꼽아볼 수 있을 텐데요. 다수의 패션 디자이너들이 블랙 컬러를 즐겨 입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유달리 흰색을 좋아했죠. 오늘은 한국을 대표했던 디자이너 앙드레 김의 일생과 커리어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흙바닥에 그림 그리던 소년, 대한민국 1호 남성 디자이너가 되다

앙드레 김은 1935년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구파발리(현재 서울특별시 은평구 구파발동)에서 출생했습니다. 특유의 이미지 때문에 왠지 특별한 집안에서 자랐을 것 같지만, 농부인 아버지 아래서 형제자매들과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평범한 유년 시절을 보냈죠. 다만 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놀 정도로 미술에 대한 흥미가 남달랐습니다.

6·25 전쟁 당시 피난 간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다시 상경한 앙드레 김은 국내 최초의 의상 전문 교육기관인 ‘국제 복장 학원’에 1기생으로 입학합니다.’퍼니 페이스’를 비롯,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 패션에 매료되어 디자이너를 꿈꿔왔기 때문이죠. ‘앙드레’라는 예명이 생긴 것도 이 즈음의 일인데요. 프랑스 대사관의 한 외교관이 ‘부르기도 쉽고 잘 어울린다’며 붙여준 이름이었습니다.

패션계에 정식으로 데뷔한 것은 1962년의 일입니다. 소공동 조선호텔 앞 ‘GQ 테일러’ 양복점의 한편을 빌려 ‘살롱 앙드레’를 열었고, 그해 연말에는 반도호텔에서 첫 패션쇼를 선보였죠. 이후 당대의 톱스타, 배우 엄앵란의 웨딩드레스를 디자인하면서 앙드레 김의 명성은 높아져 갔습니다.

◎ 트렌드 아닌 자신만의 스타일 중시한 디자이너

‘앙드레 김’ 하면 가장 먼저 흰색의 풍성한 의상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가 늘 흰색 옷을 고집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는데요. 어려운 살림에도 늘 깨끗한 흰색 옷을 마련해 입혀주었던 어머니에 대한 추억 때문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늘 여벌의 흰옷을 들고 다니며 입고 있던 옷이 조금만 지저분해져도 즉시 갈아입을 정도로 흰색과 청결에 대한 그의 고집은 대단했죠. 생전에 보통 사람 눈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약간씩 다른 디자인의 흰색 면 의상을 100벌 이상 소유했다고 합니다.

그가 디자인한 의상들은 풍성한 실루엣과 화려한 패턴이 주를 이룹니다. 역시 화이트를 베이스로 다양한 컬러와 장식을 더한 옷이 많았죠. 점차 슬림 하고 미니멀해지는 트렌드에 아랑곳 않고 옛 왕족이나 귀족들이 입었을 법한 드라마틱 한 작품을 계속해서 발표했습니다.

매스컴에서 비친 이미지와는 달리 앙드레 김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중시했습니다. 수입 원단을 쓰지 않고 국산 원단만 고집하는가 하면, 쇼에 자주 등장하는 겹옷 드레스는 한국 여성의 한을 상징한다고 밝힌 적도 있죠. 외국어와 외래어를 자주 쓴다는 이유로 2006년 한글문화연대가 ‘우리말 해침꾼’으로 자신을 선정하자 영어 사용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 ‘이마 키스’창시자는 김희선과 이병헌

‘앙드레 김의 패션쇼에 서야 진정한 톱스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의 쇼는 늘 내로라하는 유명 배우들로 채워졌습니다. 김희선, 최지우, 이영애, 송혜교, 김태희, 장동건, 배용준, 이병헌, 원빈, 송승헌, 권상우 등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앙드레 김의 옷을 입고 런웨이를 걸었죠. 김연아, 안정환, 우지원 등 훤칠한 스포츠 스타들도 그의 러브콜을 받은 바 있습니다.

앙드레 김 패션쇼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남녀 모델의 ‘이마 키스’입니다. 앞이마를 마주 댄 뒤 서서히 정면을 바라보는 이 포즈는 다른 쇼와 앙드레 김 쇼를 구분 짓는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는데요. 배우 김희선 씨는 지난해 출연한 tvN ‘토크몬’에서 “이마 키스 원조는 나”라고 밝혀 화제를 모았습니다. 패션쇼 무대에서 한 바퀴만 돌고 나가는 게 너무 아쉬워 파트너 이병헌과 함께 이마 키스를 선보였고, 이를 본 앙드레 김이 ‘판타스틱하다’며 극찬했다네요.

◎ 마이클 잭슨의 전속 디자이너 요청, 프랑스·이탈리아 정부의 훈장까지

앙드레 김은 해외 스타들에게도 사랑받는 디자이너였습니다. 브룩 실즈, 나스타샤 킨스키 등 90년대를 대표하는 여배우들이 그의 디자인을 입기도 했죠.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 역시 생전에 그의 옷을 즐겨 입었는데요. 화려한 용 무늬 자수를 매우 좋아해 시상식 등 공식 행사와 개인적인 외출을 가리지 않고 착용했습니다. 심지어 마이클 잭슨은 앙드레 김에게 전속 디자이너가 되어달라고 요청까지 했죠. 이에 앙드레 김은 “나는 우리나라를 정말 사랑해요. 대단히 죄송하지만 가난한 디자이너로 살지라도 한국의 디자이너로 남고 싶다”는 말로 정중히 거절했다고 합니다.

해외 정부로부터도 그 실력과 공헌을 인정받았습니다. 1082년에는 이탈리아 정부의 문화공로훈장을, 2000년에는 프랑스 정부의 예술문학 훈장을 받은 사실이 이를 증명해주죠.

지금까지 디자이너 故 앙드레 김 선생의 일생과 작품세계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2010년 대장암과 합병증으로 별세한 이후 현재 그의 ‘앙드레 김 아뜰리에’는 아들 김중도 씨가 맡아 운영하고 있는데요. 꾸준히 패션쇼를 개최하고 패션 품질 대상을 수상하는 등 아버지가 남긴 명성을 성실히 이어가고 있다는 소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