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오늘 삼성이 부도 처리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와 비슷한 일이 20년 전 일어났습니다. 1970년대 대한민국의 수출을 이끌었던 대우그룹입니다. 우즈베키스탄·루마니아·인도 등에 투자를 추진하며 해외에 589개의 사업장을 가진 대우는 현재 공공 분해되어 사라졌는데요. 한때 재계 서열 4위까지 올랐던 대우그룹의 몰락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967년 자본금 500만 원으로 섬유회사 대우실업이 설립되었습니다. 32세라는 젊은 나이에 김우중 회장은 서울 명동에 대우실업 간판을 세웠는데요. 수출에 주력해 창업 첫해 58만 달러의 매출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2년 뒤에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산업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는데요. 이에 힘입어 대우실업은 한국 최초로 뉴욕에 지사를 설립하며 승승장구해 나갔습니다.

대우는 점차 기업 규모를 키워나갑니다. 1976년 한국기계를 인수해 대우중공업, 1978년에는 대한조선공사 옥포조선소를 인수하며 대우조선을 설립합니다. 이와 더불어 대우건설, 대우전자 등을 창설하며 김우중 회장은 공격적인 투자를 시작했는데요. 대우는 창업 15년 만에 40개의 계열사를 가진 재벌로 성장합니다.

대우는 1993년 세계경영을 선언합니다. 그러고는 대우자동차를 중심으로 신흥시작 공략에 나서기 시작했는데요. 우즈베키스탄, 루마니아, 베트남, 인도 등 투자를 이어나갔습니다. 대우는 GM사의 지분을 전량 인수하면서 자동차 사업에 진출하였는데요. 진출 3~4년 만에 대우 자동차 판매점을 300~400개로 만들며 대우그룹의 위상을 공고히 했습니다. 1982년 출범한 대우는 순식간에 해외 589사업장과 15만 명의 직원을 갖추고 재계 4위까지 오르게 됩니다.

1999년 20세기 한국을 빛낸 30대 기업인 상을 수상하며 성공 가도를 달리던 김우중 회장에게도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1997년 한보 그룹에서 시작된 부도가 기업들의 연쇄도산을 불러왔기 때문인데요. 이에 대우도 직격탄을 맞습니다. 성공 가도를 달리던 대우의 실상을 들여다보니 차입(부채)을 통해 외형을 키워왔던 것인데요. 6억 3천만 달러의 투자금액인 우즈베키스탄 자동차 공장의 자기자본은 2천만 달러에 불과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대우의 성장 방식은 IMF를 맞이하며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1993년 대우의 부채는 자기자본의 400%에 육박할 정도였는데요. 당시 발표된 대우의 부채는 약 52조 원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김우중 회장은 구조조정을 통한 기업 개혁 대신 세계 경영을 계속해서 추진합니다.

위기에 봉착한 대우그룹은 1998년 삼성과의 빅딜 협상을 시도합니다. 삼성 자동차와 대우전자의 맞교환을 추진한 것인데요. 김우중 회장은 이 빅딜이 성사되면 기업이 다시 살아날 수 있으리란 희망을 품었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대우전자의 부실이 만 천하에 알려지며 대우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을 찾기 어려워졌습니다.

빅딜이 수포로 돌아가자 갈 길 잃은 대우그룹은 결국 1999년 8월, 구조조정에 들어갑니다. 구조조정으로 회사 41개 중 16개가 매각되었는데요. 남은 25개 회사 중 12개는 워크아웃을 신청합니다. 사실상 그룹 해체 수순을 밟은 것입니다. 1999년 10월 김우중 회장은 중국 출장에 나섭니다. 1달 뒤인 1999년 11월 1일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과 사장단은 퇴진하는데요. 이로써 ‘김우중 신화’는 32년 만에 막을 내립니다.

이후 2000년 2월 대우자동차는 국제 입찰을 시작합니다. 이후 2000년 11월 8일 대우자동차는 최종 부도를 맞이하게 되는데요. 이어서 2001년 2월 16일 1750명이 정리해고됩니다. 대우그룹의 수많은 협력사들도 도산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현재도 ‘대우’라는 브랜드의 가치는 살아남아 있습니다. 대우건설, 대우조선해양, 미래에셋대우 등 대우의 이름을 건 회사들이 존재하지만 이들은 서로 무관한 개별 회사가 되었습니다. 승승장구하며 한때 재계 4위까지 올랐던 대우,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