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알려지지 않았던 레스토랑의 셰프들이 대거 방송에 출연하며 스타덤에 올려놓은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바로 ‘냉장고를 부탁해’인데요. 쿡방의 원조로 불리던 이 프로그램에선 15분간 제한된 재료만을 가지고 메뉴를 창작해 게스트들의 입맛을 만족시켜야 했죠. 불가능할 것 같았던 시도였지만 셰프들은 수십 년간 다져온 내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중식 메뉴에서 압도적인 실력을 보인 이가 있으니, 바로 이연복 셰프입니다. 그는 각종 방송, 매체에서 러브콜을 받는 이른바 ‘스타 셰프’지만 현재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이연복은 중국 산둥성 무핑 출신의 아버지와 산둥성 라이양 출신의 어머니 밑에서 3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화교 집안 출신인데다 외할아버지, 부모님이 모두 중식당을 운영해 ‘짱깨’라고 놀림을 당하기도 했죠. 하지만 정작 이연복은 성인이 될 때까지 산둥에는 가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는 부모님이 운영하던 중식당이 잘 안돼 가세가 기울며 당시 사립이었던 명동의 외국인 초등학교 학비에 부담을 느꼈습니다. 특히, 학교에서 등록금을 내지 못한 학생들을 일으켜 세우는 상황이 너무 싫었던 그는 땡땡이를 치기도 했죠.

결국 그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중퇴를 결심했고 13세의 나이에 월급 3,000원을 받으며 철가방을 들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이연복은 아버지 지인 가게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사장과의 연을 꼬투리 잡는 다른 직원들 때문에 다른 중식당에서 배달 일을 하게 됩니다. 그는 “1960년대는 철가방도 아니고, 무거운 나무 통이었다. 육체적인 것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힘들었다. 사장의 지인이다 보니 종업원들이 왕따를 시키고 폭행까지 했다.”라며 힘든 기억을 끄집어냈죠.

독학으로 요리를 배운 이연복은 19세의 나이에 명동 사보이 호텔 중식당 <호화대반점>의 막내로 취직에 성공합니다. 그는 2년 만에 재료를 칼로 썰고 다듬는 칼판 담당으로 성장할 정도로 중식에 소질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불같은 성격 탓에 자주 소동을 일으켰고 중식당 업계에 그를 향한 좋지 않은 소문까지 돌게 됐죠.

그러다 21세의 나이에 현재의 아내 이은실 씨와 결혼을 했는데요. 결혼과 동시에 이연복은 귀화했죠. 두 사람의 결혼 과정이 쉽진 않았는데요. 화교 출신인데다 당시 분위기적으로 요리를 하는 사람을 선호하지 않아 양가에서 극심한 반대를 겪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채 10년간 동거를 했고 아이들이 생기고 나서야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결혼 후 그의 인생에는 점차 희망이 생겼습니다. 22세가 되던 해인 1980년, 그는 선배의 추천으로 주한 대만 대사관 조리장에 지원했습니다. 최종 후보 3인과 함께 겨뤘던 실기 면접에서 그의 시그니처 메뉴인 동파육 하나로 당당히 최연소 대만 대사관 조리장에 합격했죠.

대사관에서 근무로 수입 역시 훨씬 나아졌는데요. 그는 “당시 호텔 주방장급 월급이 70만 원 정도였는데, 내 월급은 250만 원 정도가 됐었다. 1980년대 일이다.”라며 높은 월급을 공개했습니다. 당시 직장인들의 평균 월급은 30만 원~50만 원 선이었죠. 이렇게 여유가 생긴 덕분인지, 실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대사관 근무 당시 가끔씩 지각을 했다며 대사님의 아침 식사를 놓쳤던 아찔한 기억을 언급했습니다.

대사관에서 일을 하던 이연복은 26세에 또 한 번 위기를 맞게 됩니다. 코에 문제가 있다고 느낀 그는 1년에 한 번씩 본인 나라로 돌아가는 대만 대사를 따라 대만에서 대수술을 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대만의 의료 기술이 한국보다 뛰어났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수술 후 후유증으로 후각을 상실하게 됐죠. 요리사에게 후각을 잃는 건 매우 치명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이연복은 이 사실을 모두에게 숨기며 미각과 촉각만으로 후각 상실을 극복하는데 성공했습니다.

1980년대 후반, 이연복은 8년간 일했던 대사관을 떠나 집안 살림을 몽땅 처분하고 일본 유학을 떠났습니다. 외국 음식에 도전해보고 싶단 열정에서 시작된 여정이었죠. 하지만 입사가 예정되어 있던 식당에선 이미 직원을 구한 상태였고 그의 상황도 점차 꼬이기 시작했는데요. 결국 그는 경력을 숨긴 채 식당 설거지부터 시작했고 야간 업소 주방장으로 일하며 돈을 모아야 했습니다.

게다가 당시 이연복은 사행성 도박인 ‘파친코’에 빠졌는데요. 도박과 탕진을 반복하는 피폐한 생활에 아내가 나가 돈을 빌려와야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은 채 기다려주었고 이에 이연복은 정신을 차리게 되었죠. 그 결과 이연복은 일본에서도 입소문이 나 도시락 가게를 창업했고 약 10년간 일본 오사카에서 체류하며 서비스 정신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연복은 1998년, 중식당을 개업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대신해 군대에 갔던 중국 설화 속 화목란이 본인과 비슷하다는 생각에 상호명은 ‘목란’으로 정했죠. 일부러 월세가 저렴한 곳을 찾아 외진 곳에 식당을 개업했지만 입소문이 나면서 손님이 몰리게 됐습니다. 하지만 건물 주인들이 매번 월세를 올린 탓에 계속해 가게를 이전해왔죠. 현재 연희동 가게는 4번째 매장이라고 알려졌습니다.

일부러 외진 곳을 찾아도 손님들이 찾아오는 중식당 목란의 매출은 월 1억 수준이라고 공개된 바 있는데요. 이연복은 오히려 방송에 출연한 이후부터 월 8천만 원 수준으로 줄었다고 밝혔습니다. 코스 메뉴를 주로 주문하던 고객층이 대중화되면서 단품 메뉴 주문량이 더 늘어났기 때문이었죠.

이연복의 아들 이홍운 씨 역시 가업을 잇기로 결정하며 3대가 중식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힘든 길인지 알기에 이연복은 아들의 꿈을 반대했는데요. 실제로 이홍운 씨는 고려대학교 졸업 후 중국에서 카지노 마케팅 홍보를 담당하는 등 일반 직장에서 일하다 요리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현재 목란 부산점 운영을 맡고 있으며 아버지와 다른 방향으로 자체적으로 메뉴를 개발할 정도로 남다른 재능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편, 잦은 방송 출연과 중식당 ‘목란’의 높은 인기에 그의 재산에도 높은 관심이 쏠리고 있는데요. 이연복은 중식당 ‘목란’이외에도 딤섬 브랜드 ‘교자란’을 론칭하는 등 사업적인 영역 역시 넓혀갔습니다. 또, 동파육, 멘보샤, 탕수육 등 그의 시그니처 메뉴를 냉동식품으로 생산해 홈쇼핑에서 완판 기록을 달성하기도 했습니다. 2016년, 이연복은 ‘목란’과 20분 거리 내에 위치한 연희동 주택을 매입했습니다. 그가 이 신축한 주택은 매입 당시 21억 5천만 원에서 2년 만에 29억 원으로 올라 시세차익만 수 억 원대로 추정됐습니다.

중식계의 신화로 불리는 이연복은 최근 은퇴를 고민하게 됐다며 깜짝 고백을 했습니다. 그는 몸이 따라주질 않아 주방을 떠날지 고민하게 됐고 때문에 아들을 더 엄하게 가르치고 있다고 했죠. 은퇴 후 유기 동물을 거두어 보호하는 시설을 운영하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밝히기도 했는데요. 앞으로 이연복 셰프가 보여줄 행보가 더욱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