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삼성 이건희는 2014년 세계 부자 96위를 기록했습니다. 1995년, 이건희 보다 높은 순위로 당당히 이름을 올린 인물이 있는데요. 바로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입니다. 정주영은 당시 62억 달러의 재산으로 세계 9위를 기록했습니다.

정주영은 ‘흙수저’ 출신으로 유년시절에는 돈이 벌기 위해 가출을 하기도 했습니다. 현대그룹도 사실 작은 쌀가게부터 시작됐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는데요. 그렇다면 가게에서 그룹까지, 정주영의 사업 도전과 현대그룹 역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은 어린 시절 집이 가난해 돈을 벌기 위해 가출을 4번이나 강행했습니다. 정주영의 아버지 정봉식은 강원도 통천에 4000평의 논과 밭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살림이 빠듯했는데요. 정주영은 아버지를 따라 농사일을 했지만 전망이 없을 것으로 판단해 가출을 한 것이죠. 3번째 가출에서는 소 판 돈 70원을 가져가 서울 부기 학원을 다녔지만 다시 아버지에게 잡혀 농사를 돕게 됩니다.

흉년이던 해 정주영은 4번째 가출을 해 서울로 올라와 복흥상회라는 쌀집에 배달원으로 취직하게 됐습니다. 정주영의 성실함을 눈여겨보던 쌀집 사장은 자신의 쌀집을 물려주기까지 했는데요. 당시 정주영의 나이는 24살이었습니다. 이후 경일상회로 간판을 바꾸고 시작한 쌀집 사업은 성공을 거두게 되었죠. 정주영은 쌀집 사업으로 성공과 실패를 전부 겪게 됩니다. 이 같은 사업의 경험은 훗날 현대그룹을 만들어내는 토대가 됐습니다.

정주영은 자동차 수리공장 사업을 해오다가 1947년 건설회사인 현대토건사를 차렸습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통역장교로 복무한 동생 정인영의 도움으로 주한미군 관련 공사를 대부분 수주하면서 현대그룹의 기반을 마련하게 됐습니다. 정주영은 한국전쟁 이후 폭파된 고령교 공사 복구를 맡게 됐는데요.

당시 현대건설은 큰 공사 경험이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고령교 공사를 진행할수록 장비 부족, 인부 파업 등 고난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신용’을 강조하며 개인 자금을 쏟아부어 1955년 완공시켰습니다. 이후 사업 규모의 확장으로 지금의 현대그룹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1965년 정주영은 국내 최초로 해외 공사인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 수주를 따냅니다. 비록 적자가 300만 달러 이상 초과한 실패한 공사였지만 훗날 정주영은 이를 경험 삼아 대한민국 경제의 중심,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맡을 수 있었는데요.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성공으로 연이어 ‘울산~언양’ 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 남해고속도로 등을 정부로부터 수주할 수 있었습니다.

1968년 정주영은 조선업에도 손을 뻗었습니다. 당시 한국의 조선업계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1%도 안 될 정도로 성공 가능성이 희박했는데요. 정주영은 대형 조선소를 건설하기 위한 차관을 얻기 위해 해외를 돌면서 알아보기 시작합니다. 당시 가장 필요한 것은 돈이었습니다. 영국은행 바클레이즈에서 돈을 빌리려면 사업 계획서와 추천서가 필요했습니다.

정주영은 영국의 조선회사 A&P 애플도어의 찰스 롱바톰 회장을 만나 설득을 시작합니다. 비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롱바톰 회장에게 한국의 오백 원 지폐를 꺼내 거북선 그림을 보여주며 영국보다 300년이 앞선 조선의 조선업을 어필한 것이죠. 거북선을 본 롱바톰 회장은 한국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바클레이즈 은행 추천서를 보냈고, 결과적으로 공사에 착공한 지 2년 3개월 뒤인 1974년 6월 국제 규모의 조선소를 준공했습니다.

정주영은 사업 영역을 점차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현대증권, 현대엘리베이터 등으로 확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2000년 이후 정주영이 타계한 뒤 형제간 계열 분리로 인해 그룹의 규모가 줄어들게 됐는데요. 이른바 ‘왕자의 난’이라고 불리는 현대그룹 경영권 승계 다툼이 벌어진 것입니다.

현재 현대중공업은 그룹에서 분리됐으며 현대건설은 경영난 악화로 채권단에 넘어갔습니다. 2020년 기준 현대그룹의 계열사는 현대엘리베이터, 현대아산, 현대 네트워크 등으로 초반보다 대폭 감소된 규모입니다. 지난 2005년과 2011년에 현대家 형제의 화해 조짐이 보이기도 했지만, 현재까지도 화해 소식은 없는 상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