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적은 이 앞으로 나서라! 나는 알레스토 가문의 로버트 알레…” 탕!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이 기사의 심장을 관통했다. 은백색의 갑옷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기사가 바람 빠진 풍선 마냥 쓰러진다.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가문과 이름을 밝힌 지휘관은 허리춤의 화려한 검을 뽑기도 전에, 차가운 땅에 몸을 뉘어야 했다. 저 멀리, 한 병사의 총구에서 스멀스멀 잿빛 연기가 올라온다. 고귀하고, 명예로운 기사의 죽음치고는 꺼진 촛불처럼 단출했다.

기사하면 무엇이 먼저 떠오르는가? 강철 갑주?, 랜스, 귀족, 기사도 등 어린 시절 우리가 한 번쯤 동경했을 만한 멋진 모습들이 떠오른다. 반면 이런 단어도 떠오르지 않는가? 고지식함, 신념, 정의 이러한 것들이 중세 시대 기사들이 안고 살았던 그들의 이름표이자 무게였다. 그리고 이 무게 때문에 기사들은 전장에서 썩은 옥수숫대 마냥 쓰러져 갔다.

명예를 중요시하며 앞으로 달려가다 제일 먼저 총을 맞고 쓰러지거나 총을 든 적 한 명을 찌르기 위해서는 수 십 명의 아군이 희생당해야 했다. 그깟 명예가 밥 먹여 주냐?라고 묻는다면 그렇다. 기사는 명예로 밥 벌어먹고사는 직업이었다. 목숨보다 귀중하고 죽음으로써 유지되는 계급인 것이다.

15세기에 들어서면서 중세 유럽은 총포가 급격히 늘어나고, 그 사용량도 증가했다. 하지만 일본의 사무라이 계층과 달리, 기사들은 투척 무기나 발사 무기의 사용을 멸시했다. 전략이 있다면 오로지 ‘돌진’ 하나였다. 방패를 높이 들고 적진으로 돌격한다. 거친 투우 떼 마냥 불을 뿜는 화구에 몸을 들이밀었다.

귀족 전사와 평민 병사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성이 있느냐 없느냐였다. 12세기 중엽에는 기사의 방패에 그려진 문장이 그들의 특별함을 대신했다. 반면 일반 병사들이 들고 있던 방패에는 자신들이 속한 부족의 장식이 그려져 있었다. 기사들은 때때로 말을 타고 나가 혈통을 밝힌 뒤, 비슷한 신분의 적을 찾고는 했다. 기사들은 혈통에 집착했고, 전투에 앞서 자신의 지위를 확인시키려는 의지가 결연했다.

싸움 방식부터가 일반 병사들과 달랐다. 기사는 적을 제압하면서 자신의 지위를 선언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싸움을 벌였다. 그들만의 세상, 그들만의 룰이 있었던 것이다. 대등한 두 상대 간의 맞대결인 결투에서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들은 결투를 통해 서로의 지위를 공유하고 인정하면서 상대에게 존중을 표했다. 기사 계급은 전쟁을 통해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권력자의 지위에 올랐다. 어떻게든 명예를 얻기 위해 전쟁터에 나가고, 힘들게 얻은 명예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다졌다.

기사들은 화약의 시대에 엄청난 피를 흘려야만 했다. 시대를 받아들이지 않고, 완고한 강철 갑옷을 둘러 입고 말을 몰았다. 1525년 프랑스 파비아 전투에서는 에스파냐 머스킷 총병의 공격에 프랑스의 기사들이 궤멸했다. 무거운 총탄은 한 사람의 목숨만 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두 사람까지도 관통했다고 한다.

유렵의 기사 계급은 화승총에서 톱니바퀴식 권총으로 무장하여 화기 기술을 채택하려 했지만 흔히들 말하는 좋은 혈통, 좋은 가문 태생의 전사들은 총포가 결코 영웅에게 걸맞지 않는다며 이를 거부했다. 귀족의 전투에 화약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일반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전투를 벌였다면 기사들은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한, 더 큰 공을 세워 지휘를 얻기 위한 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불꽃이 튀는 총포의 등장과 보병들의 역할과 전술이 달라지면서 기사는 점점 전투직이 아닌 완연한 명예직으로 밀려나기 시작하면서 이후,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꽈앙” 하며 하늘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총포의 파열음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대량 살상무기, 대포의 등장이었다. 밀집한 대열로 무리 지어 늘어선 머스킷 병, 흩어져서 전개할 경우 엄청난 약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밀집해서 이동하고 전투를 벌여야 했다. 이때 등장한 대포는 밀집 대형의 병사들을 단 한 방에 파멸시킬 수 있었다.

대포의 발견으로 전투에서 마주치는 상대방과의 거리가 더욱 멀어졌다. 서로 얼굴조차 식별할 수 없는 거리에서 싸우고, 이제 전쟁에서는 명예를 드높이는 병사들의 고함 소리가 아닌, 하늘이 무너질 듯한 천둥소리와 매캐한 화약 냄새만이 가득했다.

이제 말을 타고 달려 검을 휘두르거나, 상대편의 기마병을 향해 창을 찌르거나 화살을 쏘고, 방패를 들어 화살을 막는 등의 원시적인 전투는 끝이 났다. 방패가 사라지고, 기마병이 사라지고, 전쟁터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던 기사들 간의 결투 또한, 사라지게 되었다. 화약은 전쟁의 시간을 단축시켰으나, 더욱 파괴적이고 잔인한 말살을 가져왔다.

전쟁터에서 낭만을 노래하던 시인은 얼어붙고, 변함없는 종말이 개개인에게 내려앉았다. 흑색 화약의 시대, 책 <전쟁의 재발견>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병사들의 이야기이다. 밑에서 본 전장의 역사는 끊임없이 변화했지만, 그 끝은 항상 피로 물들어 있었음을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