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이제 틀린 말이라고 합니다. 용이 나올 개천 자체가 없다는 건데요. 그렇다면 과거에는 개천에서 어떤 용들이 났던 걸까요? 대한민국의 경제가 한창 발전하고 있던 때, 중학교 배정원서를 낼 돈도 없어 야간 중학교를 다녔지만 단호한 결정으로 자신의 꿈과 부를 모두 잡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800억 원대의 자산가가 될 수 있었을까요? 조금 더 알아보겠습니다.

준오헤어 강윤선 대표


전국에 100개 넘는 직영점을 가진 준오헤어는 성공한 헤어 프랜차이즈 중 하나죠. 준오헤어의 대표는 강윤선 대표로, 대한민국이 발전하면서 생겨난 미용실과 함께 성장해왔다고 해도 될 정도인데요. 지금은 남부럽지 않은 백만장자가 되었지만, 어릴 적 그는 중학교 배정원서 값 600원이 없어 야간 중학교에 들어갈 정도로 가난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강윤선 대표는 어릴 적부터 미용에 관심이 많았다고 스스로 말하는데요. 연탄 집게를 달궈 미용사 흉내를 내며 놀고, 아카시아 잎으로 친구에게 파마를 해주는 등 미용과 관련된 행동을 어릴 적부터 했다고 합니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그는 미용실에서 어릴 적 자신의 꿈을 떠올리고는 무궁화 기술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겨 미용 일에 뛰어들었습니다.

다행히 미용과 그의 적성은 잘 맞았습니다. 그는 1년 만에 1970년대 미용실 경쟁이 치열했던 명동으로 자리를 옮길 정도였으니까요. 1979년 20대 초반이 된 그는 돈암동으로 또다시 자리를 옮기고 자신의 미용실인 ‘준오 미용실’을 개점합니다. 이 미용실이 준오헤어의 시작이었죠. 여대생 헤어스타일의 유행을 선도하며 그는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하루 60명의 머리를 만질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 다른 업체보다 가격이 높았지만 다시 찾아오는 고객이 많았습니다. 그는 학생 시절 고객의 짐을 맡아주지 않겠다며 단호하게 쫓아내던 옛 미용실 주인을 떠올리며 고객 친화형 맞춤 서비스를 제공했습니다. 작은 친절로 단골을 유치하겠다는 그녀의 방침은 고객의 만족도를 높이는데 일조했는데요. 더울 때는 아이스크림을, 감기인 고객에게는 따뜻한 차를, 늦은 시간 펌을 하고 혼자 가야 하는 여대생을 정류장까지 에스코트해주는 등의 서비스를 제공했죠.

그의 실력과 서비스에 단골 고객은 점차 늘었고, 그녀는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마침내 직원들이 일할 공간이 부족할 지경이 되자 그는 그의 인생을 바꿀 결정을 내립니다. 수십 명이나 되는 직원들을 해외로 영국으로 유학을 보낸 것이죠. 물론 사비를 털어서 말입니다.

‘헤어 디자이너’로의 성장


강윤선 대표는 직원들을 미용사가 아닌 ‘헤어디자이너’로 양성하고자 했습니다. ‘도제’방식이라고 하죠. 당시 미용사가 되기 위해서는 미용실에서 주먹구구식으로 배워야 했습니다. 강윤선 대표는 집을 팔아 직원들을 헤어 선진국이었던 영국으로 유학 보냈습니다. 직원들은 그곳에서 헤어 미용 원리나 공식을 익혔고 5년 뒤 출범한 ‘준오헤어아카데미’의 기반을 세웠죠.

강윤선 대표의 인생관을 한마디로 줄이면 ‘성장’인데요. 그는 홀로 성장하는 게 아니라 함께 성장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경영자로서 직원들을 성장시킬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죠. 덕분에 준오헤어에는 고졸로 입사해 박사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본부장급은 대부분 대학원을 나왔죠.

경험 방침과 인센티브제를 통한 보상으로 연봉 1억이 넘는 디자이너의 수가 200명이 넘습니다. 덕분인지 이직률도 낮죠. 20년 장기근속자가 50여명에 10년 이상이 근속자는 400여 명을 넘었죠.

“가난 덕에 좌절할 틈도, 열등감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라는 그는 ‘가난, 가족, 꿈’을 키워드로 지금까지 달려왔습니다. 생계를 위해 미용업계에 뛰어들었던 그는 어느새 100개가 훌쩍 넘은 직영점과 800억 원대의 부동산을 가지고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